13. 조선왕릉 40기 답사 열 두 번째 : 남양주 광릉, 홍유릉, 사릉
2020년 3월 27일(금) : 남양주 광릉, 홍릉과 유릉, 사릉
오늘은 매일 연속해서 1일 만보 이상 걷기 그 631일째 되는 날
9.6㎞, 13,723보를 걷고 오늘의 걷기를 마감했습니다. 또한 지난 2월 1일부터 시작했던 조선왕릉
40기 답사 그 열 두 번째 길나섬으로 남양주 광릉/홍유릉/사릉 세 곳을 답사완료 했습니다. 오늘
현재 답사율은 37기 ÷ 40기 = 92.5%. 이제 여주의 英寧陵과 영월의 莊陵 3기만을 남겼습니다.
1. 광릉(光陵)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마비(下馬碑).
평화누리길 제11코스(임진적벽길) 숭의전 입구 홍살문(紅箭門) 왼쪽 아래에도 있지요? 하마비의 원문은 세조 광릉 하마비와 같이 大小人員皆下馬. '신분을 떠나 누구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 담겨 있답니다.
광릉(光陵)은 대한민국 사적(史跡) 제197호입니다.
▲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쓰러진 약 100년생 전나무와 잣나무라고 합니다. 이 나무들은 自然의 순환과정을 따라 완전히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중이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네요.
조선 7대 세조(世祖)의 광릉은 홍살문에서부터 정자각(丁字閣)까지 참도(參道) - 香路와 御路 박석이 깔려 있지 않습니다. 그냥 맨 땅이네요. 세조(1417 ~ 1468)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데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던 업보 때문에(제 개인 생각임) 말년에 지독한 피부병으로 고생했었고 佛敎에 귀의했던 王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눔의 권력(權力)이 뭔간디~!
금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광릉 내에 답사객은 이 두 분과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광릉 정자각입니다.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世祖陵과 貞熹王后陵이 각각 단릉 형식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동원이강릉(同原二岡陵)입니다. 그런데 세조릉과 정희왕후릉 좌우 언덕 가운데에 너덜겅 바위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 특이하더군요.
▼ 왼쪽 언덕이 세조릉,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릉. 가운데 움푹 패인 곳에 너덜바위가 특이합니다.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슬하에 德宗(추존)과 8대 예종(睿宗)을 두었고, 두 아들 모두 일찍 승하고 덕종의 둘째 아들인 13세 자산군(9대 成宗)을 즉위시키고 7년동안 朝鮮 최초의 수렴청정을 했답니다.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비각(碑閣)과 수복방입니다.
정자각에 오르는 신계(神階)와 어계(御階).
비각 안 비문의 앞 뒤를 찍었습니다.
朝鮮國
世祖大王光陵
貞熹王后부左岡
하마비 오른쪽에 정방형의 '연지'가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는 광릉 재실(齋室)이 있고
광릉 재실 주변에 몇 송이 안 핀 진달래꽃과 산수유꽃 색깔이 대비됩니다.
↘ 이 나무는 연리근(連理根)인 것 같아 보이죠?
광릉 역사문화관은 COVID-19 때문에 휴관에 휴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긴 우산을 갖고 답사에 임했는데 역사문화관 문앞에 우산꽂이가 있네요.
2. 홍유릉(洪裕陵)과 영원(英園) 그리고 영친왕/덕혜옹주묘
광릉 답사와 광릉숲길 걷기를 마치고 같은 南楊州市에 있지만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금곡동(金谷洞) 소재의 홍릉과 유릉을 찾아 달려 갔습니다.
홍릉과 유릉은 대한민국 史跡 제207호입니다.
홍유릉은 유료주차장을 운영하고 있더군요. 행주산성 대첩문과 같은 출입문을 통해 홍유릉에 진입했고
시계반대방향으로 답사하기 위해 조선의 마지막 27대 왕 순종(純宗)의 유릉(裕陵)을 먼저 둘러 봅니다.
2-1. 유릉(裕陵)
王이 아닌 皇帝陵으로 조성된 홍릉과 유릉은 기존(1대~25대) 조선왕릉과 石物의 위치와 종류, 숫자가 다르며 정자각(丁字閣) 대신 일자각(一字閣)의 침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릉의 재실입니다. 재실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유릉(裕陵)은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 3인의 합장릉입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의 합장릉.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으며 홍살문에서 일자각(침전)까지 가는 參道에는 역시 향로와 어로 박석이 깔려 있는데, 중앙 향로는 높고 좌우에 어로는 낮습니다. 어로가 좌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릉의 비각입니다.
유릉 비각 表石의 비문(碑文). 왕이 아닌 皇帝로 표기.
재실에서 일자각까지 별도의 박석이 깔려 있습니다. 神路로 보입니다.
어정(御井)이 아니라 제정(帝井)입니다. 임금(황제)가 마시는 우물.
유릉 純宗의 능침에는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 놨습니다.
26대 高宗 때 만든 둥근 '홍릉 연지'입니다'
2-2. 홍릉(洪陵)
홍릉(洪陵)은 고종과 명성황후 閔 씨의 합장릉.
홍릉의 판위(板位)는 홍살문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왕이 참배 왔을 때 머무르는 곳.
홍릉 表石 뒤에는 陰記되어 있는 내용이 한 글자도 없다고 합니다.
홍릉 일자각(침전)에 오르는 신계와 어계. 왼쪽 神階에 비해 오른쪽 어계(御階)가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홍릉 재실(齋室)은 먼 발치에서.
2-3. 영원(英園) / 회인원(懷仁園) 가는 길
홍릉과 유릉에서 별도의 능역에 마련되어 있는 의민황태자(영친왕) 등과 황세손(李 구)의 英園과 懷仁園으로 넘어가는 샛문입니다. 이곳을 지나갈 때에도 입장권 확인을 한 번 더 합니다. 그리고 원(園) 입장은 무료입니다.
영원의 재실(齋室)입니다.
2-3-1 : 영원(英園)
영원(英園)의 정자작은 마침 문화재청에서 한창 보수 중이더군요.
영원 비각 속 표석의 비문입니다.
2-3-2. 영친왕과 덕혜옹주묘
영원(英園) 답사를 마치고 약 3~400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高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고종의 後宮인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義親王)과 고종의 고명 딸 덕혜옹주의 묘가 있어서 마지막으로 둘러 보았습니다.
홍유릉 능역에는 금천교(禁川橋)가 두루 사방에 많이 놓여져 있습니다.
26대 高宗 홍릉(洪陵) 연지를 지나서
3. 사릉(思陵)
※ 광해군묘는 사전 인터넷 예약 후 20일 지나서 답사 가능하다고 해서 다음으로 미룹니다.
폐위된 두 왕 - 연산군과 광해군묘는 조선왕릉 40기에 불포함되지만.
오늘의 첫 답사지인 光陵의 세조(世祖, 수양대군)가 조선 제7대 임금이고, 단종(端宗)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文宗의 승하 후 1452년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자, 2년 뒤에 왕위를 물려주고(선위) 허울 뿐인 上王으로 물러났었죠.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죽임을 당하자) 정순왕후는 매일 정업원 뒤 산봉우리(東望峯)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ㅠ.ㅠ
中宗 16년(1521) 82세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고 그로부터도 177년 뒤인 숙종 24년(1698)에 定順王后로 복위될 때 思陵으로 능호를 올렸다고 합니다. "端宗哀史!" ㅠ.ㅠ
사릉(思陵)은
왕릉의 주요 배치(홍살문, 향 · 어로, 정자각, 능침 등)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사릉은 단종이 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기에 君夫人의 예로 장사 지낸 뒤 후에 王后陵으로 추봉되어 다른 능에 비해 단촐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능침을 3면의 곡장(曲墻)이 둘러싸고 있으며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답니다.
단종왕비 定順王后(1440~1521)의 비각 속 비문
朝鮮國 定順王后 思陵
남양주 사릉 수복방(守僕房 : 능을 지키는 관리인이 임시 머무는 건물, 守直房이라고도 함) 터.
향로와 어로 오른쪽에 있는 정방형의 판위(板位).
사릉 재실(齋室) 또한 단출합니다. 모든 조선왕릉의 재실 건물에는 '단청'을 하지 않습니다. 무채색.
사릉 정문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후문쪽 재실 담장 앞에는 매화나무와 진달래꽃이 피어 있네요.
강원도 영월 장릉에도 능 주위에 한양(서울) 쪽을 향해 굽어 있는 소나무가 많은데
이곳 정순왕후릉 주위에도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차량들 옆에 있는 저 건물은 思陵 관리사무소 겸 조선왕릉 자연생태 전시관이고 인근 光海君墓, 안빈묘, 성묘 등 전역에 CCTV가 설치되었다는 안내문이 서 있습니다.
비공개로 되어 있는 조선 15대 광해군(光海君)묘, 안빈(安嬪)묘, 成墓.
차량 이동까지 포함한 산길샘 앱 트랙과 통계
차량 이동까지 포함한 트랭글 앱 트랙과 통계/그래프
오늘 현재까지 답사완료한 37기/40기
제 三星 똑딱이 디카 사진 182장을 하나의 GIF로 묶고 다시 MP4 비디오로 변환하여 올립니다.
끝.